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9
보스톤코리아  2014-01-27, 11:39:33 
다음에는 휴정을 따르던 1,000여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승병장으로써 임진왜란 때 싸운 유정을 살펴 본다. 법명인 유정보다 사명당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544년에 태어났다.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며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경상북도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直指寺에 출가하였다. 17세에 선과禪科에 급제하였고 당대의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묘향산의 청허당 서산대사를 찾아가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나서 크게 각성하였고, 그 후 전국의 명산과 사찰을 수행하였으며,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아름답던 꽃잎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오랫동안 참선을 하였다. 

사명당도 청허당과 마찬가지로 정여립의 역모사건 때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으로 서산대사를 도와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서산대사가 늙어서 물러난 뒤에는 그의 휘하의 승병들도 통솔하여 도원수 권률과 함께 의령에 가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또한 왜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으로 세번이나 방문하였다. 당시 보여진 사명당의 대담한 기백은 조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수련과 수행을 통하여 ‘도道가 통通한’ 대선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준다. 다음은 지봉유설30)에 실려있는 일화이다. 그가 왜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울산에 진을 치고 있는 왜장 가등청정의 진중을 방문하였을 때 가등청정은 사명당에게 “귀국에는 보물이 있는가” 라고 물었다. 

사명당은 “너의 머리가 보물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왜 그러냐”고 묻자, “너의 머리에 천금만호가 걸려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느냐!” 라고 대답 할 정도로 담력이 컸다. 1604년에 그는 오대산에서 스승 청허의 부음을 듣고 가던 중 임금 선조의 부름을 받고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갔다. 덕천가강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을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사명당은 무예가 출중하여 무술의 경지를 훨씬 넘어서 도술의 경지에 달했으며 명석하면서도 대담하기가 버금할 자들이 없었다. 

사명당에 관한 야사와 설화는 수없이 많다. 몇가지만 짚어서 그의 명석하고 대담한 기질과 도술의 경지를 임진록31)에 실려 있는 글을 참고로 해 보기로 한다.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들은 문화 번성국임을 자랑하려고 사명당이 가는 길에 시가 적힌 3백60칸의 병풍을 늘어 놓았는데 그가 지나가면서 다 외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덕천가강과 마주한 자리에서 다 들려줬다. 그런데 한칸의 글이 빠졌다고 하니, 그것은 접혀있어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외울 수가 없었다고 해서 가보니 참으로 한칸은 접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명석한 예지를 과장한 것이겠지만, 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덕천가강과의 선문답은 그의 담대한 배짱과 신기를 엿보이기게 한다. 덕천가강이 먼저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石上難生草) 방안에서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렵거늘(房中難起雲) 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기에(汝爾何山鳥) 여기 봉황의 무리속에 끼어 들었는가?(來參鳳凰群)” 이라고 얕잡아 보면서 나오니, 사명당이 맞받아 치기를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인데(我本靑山鶴)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놀다가(常遊五色雲) 어느 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一朝雲霧盡) 잘못하여 닭무리 속에 덜어졌노라(誤落野鷄群)” 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응수인가! 자신감과 자존감 가득한 이런 용기는 무술 수련의 궁극적인 목표의 하나를 달성한 참무도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하나의 무술수련의 목표인 극기를 통한 ‘자아 완성’과 ‘정신일도하사불성’의 예화 또한 임진록에 전한다. 왜왕이 그를 죽이려고 무쇠막에 넣고 불을 짚혔는데 사명당은 네 벽에는 ‘상霜’ 자를 바닥에는 ‘빙氷’ 자를 써 부쳐 놓고 도술을 부렸다. 그들이 사명당이 죽은 줄 알고 문을 열어 보니 눈썹과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다니던 몇몇 사찰에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이것이 살아나면 내가 어디엔가 살아있다고 말했으며 지금도 그가 꽂아 놓은 지팡이는 몇몇 사찰에서 새싹이 돋아나 꽃을 피운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는 1610년 해인사에서 설법을 하다가 가부좌를 한채로 입적하였다. 

30) 지봉유설은 광해군6년인 1614년에 지봉芝峰 이수광이 지은 백과사전류로 천문, 지리, 병정兵政, 관직, 유도儒道, 경서, 문학, 인물, 궁실, 복용服用 등 3,435개조의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서적이다.

31) 임진록은 작자미상의 군담소설이다. 인조 이후의 작품으로 추측하며 한글본과 한문본이 있다. 사명당, 서산대사, 이순신 등의 활약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일본까지 쳐들어 가서 도술로서 왜왕의 항복을 받는다는 통쾌한 내용의 소설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바닥에 떨어진 백성들의 자존감을 올린 소설로 평가 받는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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