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0
보스톤코리아  2014-02-03, 11:49:50 
이번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 몇명을 무예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고을 수령들은 왜적을 대항하여 싸우지 않고 자신의 일가一家를 이끌고 피신해 버리자 이에 분개한 고경명, 조헌, 곽재우, 김천일 등이 충의단심忠義丹心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이 ‘임진4충신’ 으로 불리우는 대표적인 의병장들이며 그들은 백성들을 왜적의 살육으로 부터 구해야만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관리의 후손으로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볼 수만 없었기에 분연히 일어난 지식인의 양심이었다. 

먼저 고경명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동래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마치고 낙향하여 생을 보람되게 마무리 하기 위하여 고향 광주를 위해 할 일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때가 1592년 봄,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는 “지금이 내 인생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할 때다.” 라면서 환갑를 바라보던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각오로 전황을 주시하였다. 왜적은 파죽지세로 도성을 점령하였고 임금은 의주로 피신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지은 격문은 구구절절 나라사랑과 전장에서 죽음을 각오하는 용맹심으로 가득찬 명문으로 지금 읽어도 나라와 가족을 위하는 남아라면 분연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다. 

그 결과 한 달만에 6,000 ~ 7,0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으로 향했다. 그는 의병장 조헌과 함께 금산성 탈환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이 금산성전투에서 아들 고인후, 유팽로, 안영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죽고 패전하였지만 왜군의 전주공격을 막았다는데 큰 의미가 있으며, 개전 초기 관군들이 줄줄이 패하는 가운데서 의병이 중심이 되어 왜적의 주력군과 맞서 싸운 최초의 전투임에도 의미가 깊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큰 아들 고종후를 비롯하여 휘하의 최경회, 임계영, 변사정 등이 계속 의병을 일으켜서 조선땅, 특히 호남지역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임진왜란 동안 고경명의 집안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과 두 아들, 동생 고경형(고경명의 아들인 고종후와 함께 1593년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서제庶第 고경신(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러 제주도에 갔다가 풍랑에 익사하였다.), 딸과 사위등도 왜적의 칼에 순절하였다. 당시 세간에 떠돌던 유명한 말 가운데 ‘무청사 무제봉 無晴沙 無霽峯’ 이란 말이 있었다. 이것은 ‘청사가 없었으면 제봉도 없었다’는 말인데, 청사는 고경명의 막내 아들 고용후의 호이다. 임진왜란 당시 16세였던 그가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서려니까, 고경명이 너는 나이도 아직 어리지만 무엇보다도 살아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전장에 데려가질 않았고, 고용후는 집안의 부형을 다 잃은 가운데서도, 후일 과거에 급제하여 고경명 일가의 활동과 행적을 모두 다 기록으로 남겨서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32) 특히 의병장으로 지낸 그의 짧은 생은 아들 고용후가 아니면 지금쯤은 설화로만 전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많은 사료가 있지만, 의병활동에 관한 내용은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선조25년, 수정 26권,1592년)에 보면 “경명은 문학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 중략…  풍류와 문채는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바였으며 중년에는 벼슬길이 막혔으나 조용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리에 임해서 절개를 드러냈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를 일찍 기용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는 시詩는 대가大家로 불리워졌으며 유고遺稿가 세상에 전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금산성전투에서 충의만을 앞세워 무모하게 돌진하다가 승리를 못했지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시문에 비할자가 없었으며 

동시에 의협심이 아주 강하였다. 호주가로서 풍류를 즐겼지만 청렴한 관리였으며, 무술을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관군들 보다도 더 용맹하였고 참무도인의 지표인 원광의 세속오계를 실천하였다. 즉 나라가 위태로울 때 그는 예순의 노구로 젊은이들에 앞장서 왜적들과 맞섰던 진정한 애국애민의 표상이었다. 

32) 청사집晴沙集, 정기록正氣錄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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