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7
보스톤코리아  2014-03-24, 10:35:56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불과 두 달간에 일어난 전쟁으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외침外侵 중에서 가장 짧은 기간의 가장 치욕적인 전쟁으로 기록 된다. 정묘호란 후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식량지원과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선 등 많은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 1632년(인조10년)에는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로 요구하였고 신하의 나라가 되라는 굴욕적인 강요에 척화론이 대두 되면서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반면 내몽골을 평정한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개명하고 황제의 존호를 요구하면서 사신을 조선으로 보냈다.41) 그러나 인조는 척화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사신들을 접견하지도 않았고 국서도 받질 않았다. 그리고 8도에 선전교서를 내려 전쟁을 준비하였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인조14년) 12월2일 10만의 병사들을 직접 거느리고 심양瀋陽을 출발하여 9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출병 10여일 만에 도성을 위협하였고, 그제야 조정에서는 허겁지겁 대비를 하였다. 

이 대비라는 것이 고작 왕과 왕자들이 조정의 중신들과 함께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것이었다. 물론 주화론자였던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어 협상을 하면서 피신할 시간를 만들기도 해봤지만 왕자들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는 벌써 적들이 진을 치고 있어 발길을 다시 남한산성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8도에 거병 격문을 돌렸지만 중과부적이었다. 

16일에는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 정월에는 청태종이 인조가 직접 나와서 항복하라고 요구하였다. 성안에서는 김상헌을 대표로 하는 척화론자들과 최명길을 대표로 하는 주화론자들의 격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성안에 비축되어 있던 50여일 분의 식량으로는 바닥이 점점 가까와 지고 혹독한 추위에 군사들은 사기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1만2천의 군사로서는 청의 10만 대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화론의 주장이 채택되어 입성한지 47일 만인 1월30일 인조는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현재의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항복하였다.42) 이 날의 항복의식은 조선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때 까지 청의 간섭을 받아왔다.43) 19세기에 들어 와서 서양의 함포에 청이 개항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많이 잃었지만 처음에는 군신의 관계로 성곽의 증축이나 수리도 허락 없이 할 수 없었고, 소현세자와 왕자(봉림대군, 후일 효종) 그리고 대신들의 자녀도 인질로 잡혀갔다. 

특히 척화파의 강경론자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은 잡혀가서 참형을 당했으며 김상헌도 나중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조공을 받던 나라에서 조공을 바쳐야 되는 관계로 변하게 되니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정신적인 충격이 대단하였다. 야인野人들이라고 멸시하던 여진족과 만주족에 패한 허탈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반면에 의분에만 차서 북벌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많이 있었다. 

특히 심양에 인질로 잡혀가서 긴 세월을 보낸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이 되었을 때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을 하기 위하여 많은 훈련과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으로 옮겨지진 않았다. 병자호란은 약2개월간의 짧은 전쟁이었고 국토가 폐허되거나 인명의 피해가 별로 없었지만(수 십만의 인질이 청나라로 잡혀 갔다가 돌아왔다) 조선의 임금으로 부터 하층민의 백성에 이르기 까지 받은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41) 1636년(인조14년) 음력2월 용골대, 마태부 등의 사신이 왔다. 그러나 최명길같은 주화론자도 있었지만 척화론에 밀려 사신도 접견하지 않고, 8도에 선전교서를 내렸다. 한편 청은 음력4월 국호를 청으로 개명하고 조선 원정군을 조직하여 침략을 준비하였다. 

42)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무릎꿇고 절을 한다고 하여 ‘삼궤구고두’라고도 한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 구령에 따라 땅 바닥에 머리를 대고 세 번 절하고 술 세 잔을 받을 때 마다 한 잔에 세 번씩 절을 하다. 인조는 청나라의 막강한 화력과 10만의 군사에 포위되어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 있다가 추운 겨울날 삼전도로 나가 청태종 홍타아지에게 삼배구고두로 항복을 하고 나서 세자와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궁궐로 들어 왔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正史도 그날의 치욕적인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지만, 1938년에 출판된 월탄 박종화의 ‘대춘부待春賦’나 현대인의 눈으로 쓴 김훈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참혹성과 그 날의 비애를 잘 묘사하고 있다.(의병활동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면도 있지만…) ‘인조가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나라를 지켜 냈기에 우리는 만주족이나 여진족에 동화되지 않았고 지금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으로 대한민국을 선진화시키고 있지 않는가!’라는 견지는 음미해 볼만한 생각의 각도가 아닌가…

43) 청일전쟁: 1894년 7월25일(선전포고는 8월1일) 부터 1895년4월17일까지의 청나라와 일본간의 한반도에서의 권리 점위를 하기 위한 전쟁으로 만주와 한반도, 대만 그리고 황해에서 치러진 전쟁이다. 물론 일본은 ‘일청전쟁’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난 전쟁이기에 ‘중일갑오전쟁’ 이라고 부르며, 세계사에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승리로 1895년4월17일 하관조약下關條約, 즉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 지배력을 뻐쳤다. – 조약 1조에 ‘조선이 독립 자주 국가임을 확인하고….’ 라는 문구가 있지만 일본의 야욕은 조선의 영원한 지배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봄이 보인다 2014.03.24
디지털카메라의 이해와 활용 컬럼 200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2014.03.24
눈밭에서 바퀴는 헛돌고 미끄러져 빠져나올수 없었다. 지난 가을 낡은 타이어를 갈았어야 했다. 한 일년 더 버텨볼 요량이 후회로 돌아 왔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7 2014.03.24
인조와 병자호란
통일로 가는길 3 2014.03.24
통일 한국은 그야말로 ‘아시아 세기’ 의 주축으로 새 태평양 시대를 열게 되고 동, 북 아시아의 경제 종주국이 될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또한 통일 한국은 동아시..
영민 엄마와 함께하는 재정계획 (223) : 재정설계사의 교육 2014.03.20
일반 투자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재정설계사를 찾아갑니다. 몇십 년 동안 마련한 은퇴자금을 잘 운용하여 남은 인생을 조금 여유 있게 살아보자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