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9
보스톤코리아  2014-04-07, 11:57:55 
그럼 지금부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중 의병장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몇명의 생애를 따라가 본다. 이 양 호란 중에는 의병활동이 임진왜란에 비하여 상당히 미약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때부터 병자호란 까지의 기간은 짧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전투를 한 기간은 두 호란 모두 그다지 길지 않다. 하지만 왕이 직접 수항단에서 그것도 여진족과 만주족에게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하였다는 것은 조정은 물론 모든 백성들에게 입힌 정신적인 충격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의병을 조직하여 대항해 볼 틈도 없이 적의 수중에 모든것이 넘어 가고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또한 임진왜란 후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파탄으로 사회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감은 완전히 상실되어 있었기에 애국심이나 충성심에 앞서 굶주림의 해결과 일상의 안위가 더 급급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봉기할 물리적인 시간도 길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 또한 애국충정에서 멀어져 있었다. 양란 모두 도성 이북에서 일어난 전투라서 관군들은 남쪽에서 동원되었지만 의병들은 거의 모두가 서북지역에서 일어났다.    

먼저 평안도 용천46)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립李立이 대표적이다. 이립은 이입용이라고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혼용 기록되어서 이름이 전한다.(본명은 이정립이라고도 전한다) 1627년1월 암니(아민阿敏)가 3만의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용천에서 안종록, 장린, 장희준, 김우, 이충걸 등과 함께 3쳔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항전하였다.

그는 용감하게 의병들을 지휘하여 3월에는 불과 3일 동안에 수만의 적병들을 대항하여 4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공으로 인산첨사에 임명되었고 6월에는 관서의병장이 되었다. 청군은 침략 후 곧 강화조약을 맺었지만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하지 않고 있었기에 이립은 섬과 육지를 오가며 여진족을 계속 토벌하였다. 

그러다가 관서의병장으로 임명된 얼마 후 섬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생년월일이 불확실한 관계로 몇 살에 사망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임진왜란때도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의 평양성전투, 행주대첩, 소사전투 등에서 쿠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黑田長政)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연합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임진왜란(1592년) 부터 참전한 기록을 보면 아마도 사망할 당시는 노장老將이었음이 틀림없다. 1627년7월24일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립이 섬속에서 병사하였다”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의 기록이 6월20일인 관계로 그의 정확하지 않은 사망일자는 6월20일과 7월24일 사이로 보고 있다. 임진왜란의 공로로 관직에 몸을 담은 경력이 있지만 그는 관서지방 초야에서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위하여 야전에서 목숨을 바쳤다. 그의 삶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관官에 속한 병兵이라기 보다는 민民을 대표한 의인, 즉 진정한 무인武人의 표상이었다. 그가 죽은지 109년이 지난 1736년에 안주의 충민사47)에 배향되었다.

46) 평안북도 용천군은 우리 한반도의 최서북단의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압록강과 삼교천에 의해 이루어진 복합삼각주로서 옛부터 토질이 비옥한 평야지대이다. 그리고 이립의 본관인 단양丹陽 이씨들의 집성촌이 많은 곳이다. 단양은 현재의 충청북도 단양을 말함이며 시조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도운 이배환李盃煥이다. 이배환은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로서 삼한벽상공신으로 책록되었고 문하시중을 지냈다. 하지만 이배환 후손들의 기록이 없어져서 고려시대때 출사出仕 벼슬을 한 10세손 이방규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배환의 14세손인 판서 이거경의 아들 이무李茂가 참찬문하부사로 재직 당시 이방원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당시의 세자인 이복 동생 방석과 방번 그리고 그들을 지지했던 정도전일파를 불시에 습격하여 제거한 사건)을 성공으로 이끄며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봉해짐으로써 단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단양은 고구려 시대에는 적산현(적성현)으로 불리었고 신라가 551년 진흥왕때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로 부터 뺏은 땅이다. 그리고 그 당시 세운 적성비가 현존하고 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단산현으로 개명하였고, 1318년(충숙왕5년)에  단양으로 개칭하였다.

47) 1681년 평안남도 안주군에 세워진 충민사는 북한 국가 지정문화재 7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원형이 보존되어 있음이 통일부 북한도서 민족문화 백과사전에 있다. 충민사는 처음에 충장공 남이흥南以興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남이흥 역시 무신으로 인조반정 후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괄의 ‘이괄의 난’을 평정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안주에서 청군에 대항하다가 무기가 떨어지자 김언수, 함응수, 장돈, 양진국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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