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와 정조대왕(1)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0:42:59 
2014-07-25

 이산, 정조의 이름이다. 그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1752년에 태어났다. 8세 때인 1759년에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수업을 하였다. 

 생부 사도세자가 정신질환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처럼 정조 역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 세손 시절을 보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개인 도서실인 ‘개유와’에서 공부만 하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다. 때때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홍국영59)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보신책을 강구하였다. 1775년 영조가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고, 이듬해 영조가 83세로 죽자 1776년 25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왕으로 즉위하였다. 

 노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왕위에 오른 정조는 규장각 설치 함께 실학자들을 앞세워 문예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역사상 가장 많은 서적을 저술하고 편찬한 시기가 정조대이다. 수만권의 책을 보유하고 학자들을 모아 정책을 연구하였고 규장각에서 과거의 대과를 직접 관장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1780년에는 세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홍국영마저 축출한 후 견고한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또한 그의 업적으로는 화성 건설이다. 생부 사도세자를 죽이고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노론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수도를 화성(수원)으로 천도하려고 쌓았던 성이다. 이 축성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또한 사회적으로는 천주교가 활성화되었다. 조선에는 17세기 부터 천주교가 들어왔다. 그리고 남인들을 중심으로 쇠락한 양반들의 신자가 늘어났다. 대표적으로 권철신, 이벽, 정약용 형제 등이다. 이승훈은 1783년(정조7년)에 북경에서 처음으로 영세를 받았고, 이듬해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1791년에는 윤지충, 권상연 등은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면서 서학과 성리학의 대충돌의 파장은 당시의 사대부들이 감당하기 힘든 대혼란의 사건이었다. 곧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와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정조대에는 천주교를 금지하긴 하였지만 심하게 단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조가 즉위한 때인 1800년경에는 신자 수가 1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그 외에도 왕의 전속 친위대인 장용영을 육성하였으며, 서얼의 등용과 노비제도 혁파60)와 지방 수령의 권한 강화를 하면서 동시에 암행어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59)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 시절 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호위하였다. 정조 역시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다 보니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 여러차례 결정적인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일화 한 토막, 어느날 세손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영조에게 세손이 ‘시전’의 ‘요야편’을 읽는다고 무고하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영조의 명으로 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셨으니 그 깊은 은혜 갚고자 할진대 하늘이 끝이 없음과 같다.” 라는 내용이 바로 요아편이다. 그래서 영조가 세손을 불러 오늘은 어떤 글을 읽었는지 하문하였다. 사실대로 시전을 읽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영조가 읽지 말라고 했는데 읽었다며 내시에게 책을 가져오게 하였다. 동시에 세손은 안절부절하였다. 그리고 내시가 가져온 책을 살펴 본 영조가 ‘요야편’을 도려낸 이유라도 있느냐고 물으니 세손은 엉겹결에 전하께서 읽지 말라고 해서 칼로 도려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영조가 앞으로도 읽지 말라고 하면서 책을 돌려주었다. 

 등골에 진땀히 흥건한 세손이 동궁으로 돌아 오니 홍국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국영 “저하, 요야편은 여기에 있사옵니다.” 세손은 “그대의 재치로 내가 살았소. 앞으로 그대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내가 반드시 용서하리라.” 라고 말하면서 홍국영의 손을 잡고 몇번이나 고마움을 전했다. 후일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홍국영은 출세가도를 달리며 도승지가 되었고, 왕 다음가는 세도를 누리면서 조선 왕조사에 처음으로 ‘세도’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그는 왕 정조의 지원과 묵인하에 정조의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대표적으로 축출된 사람들이 왕대비 정순왕후의 동생인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켰으며 정후겸과 홍인한 등 정조의 즉위를 반대한 세력들, 특히 노론벽파들이 조정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홍국영은 자신의 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드리면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그가 바로 원빈 홍씨이며 그 원빈이 1779년(정조3년) 5월에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홍국영은 자신의 동생이 독살되었다며 중궁전의 나인들을 너무나 가혹하게 다스려 많은 비난의 여론이 일었다. 그래서 정조 역시 그의 기세와 세도가 너무 지나치고 또 왕권의 친정이 안정궤도에 들었기에 홍국영을 조정에서 물러나가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2살이었으며 무한한 세도를 누리다가 허무하게 쫓겨났다. 

 60) 노비추쇄도감, 즉 도망친 노비를 뒤쫓는 기관을 없앴으며 노비목록을 적어 놓은 ‘선두안’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면서 노비제도를 없애려는 다양한 정책을 구사하였지만 양반들의 반발로 노비제와 신분제를 폐지하지 못하고 갑오개혁(1894년) 때의 신분제 폐지의 초석만이 되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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