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와 박제가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3:32:40 
2014-08-15

 이덕무, 백동수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한 박제가는 조선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언행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과격한 행동가였고 급진적 개혁론자였다. 그는 박평朴坪의 서자로 한양에서 175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박평은 우부승지를 지냈으며 그는 고려 충렬왕 때 내부시승을 지낸 박척의 후손이다. 정치적으로 그의 가계는 소북계열에 속했는데 박제가가 노론으로 이적하였다. 그의 6대조 때부터 소북계열로 아주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관찰사, 승지 등의 관직으로 문신의 가계를 이어 왔다. 

 그러나 박제가의 생모는 첩이었고 그는 서자였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하였으며 한 번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필사하면서 암기를 하였고, 항상 붓을 가지고 다니면서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허공에 글을 쓰며 자랐다고 한다. 

 그의 탁월한 재능을 본 박평은 그가 서자인 것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했지만 당시의 신분상 어쩔 수 없이 마냥 그가 좋아하는 시문과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1760년, 그가 11살때 그들 모자를 돌봐주던 아버지 박평이 죽자 그들은 본가를 나와 거처를 자주 옮기면서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관상(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이다.)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관상 또한 그의 천부적인 소질을 높이 사면서 가장 아끼는 제자로 키웠다. 그리고 자신의 서녀를 그에게 출가 시켜 박제가를 서녀사위로 삼았다. 결혼 당시 그는 16세였다. 

 이 같은 사회적 신분제도로 인하여 천대와 멸시를 받고 자란 박제가는 양반제도와 사회계급의 모순에 불만을 갖고 비판하면서 하층민과 빈곤한 농민들의 삶과 ‘인권’을 대변하면서, 후일 노론의 거두 심환지에게 까지도 직설을 하면서 대들곤 하였다. 장인 이관상 역시 아버지 박평과 같이 늘 그의 재능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그가 서자로서 출사를 할 수 없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면서 성리학 등 많은 서적을 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후일 그가 19세 때 연암 박지원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면서 그의 문인이 되었고, 당적을 소북에서 노론북학파로 옮겼다. 연암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많은 실학자들과 교제하였다. 이중 이덕무와는 아주 절친한 벗이 되었다. 아홉살이나 연상인 이덕무와 평생을 함께하는 교제는 둘 다 서얼이었으며 북학에의 관심이 일치했음이다. 그리고 그들은 북학의 선구자인 홍대용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의 나이 27세 때인 1776년, 그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실력있는 젊은 학자들을 많이 등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조는 ‘서얼허통절목’을 공포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양반들로 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은 이 왕명은 당시 또 다른 사회의 한 면인 서얼차별의 사회문제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 왕명으로 인하여 박제가는 북학에 조예가 깊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정평으로 청나라 사은사로 가는 수행단에 합류할 수 있었고 당시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채제공을 수행하여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리고 청나라에서 보고 배운 문명의 이기들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주었고, 그는 여행기간 동안 체험한 상세한 기록들로 ‘북학의’라는 대논문을 저술하였다. 

 북학의는 내외 두 편으로 된 책이다. 내편에는 수레, 배, 성, 벽, 궁실, 도로, 교량, 소 말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과 기구들이 서술되어 있고, 외편에는 전제, 농잠총론, 과거론, 관론, 녹제, 제정론, 장론 등의 정치와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개혁방안을 서술하였다. 그는 북학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정치적으로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형식에 얽매이고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과기시험 그리고 적서의 차별로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서자와 백성들의 기회 등을 혁파하여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통이라는 이름과 타성에 젖은 나라의 정책과 제도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했다. 경제적으로는 생산 못지 않게 소비를 많이 해야 삶이 윤택한다고 주장하였다. 청빈과 근검절약은 미덕이 아니며 그것은 결국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선구자적 혜안은 ‘소비가 미덕’이라는 현대 자본주의 이론과도 부합된다. 그리고 국제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당쟁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양반’들을 계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적 차별을 없애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상공업을 천시하지 말고 장려해야 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적으로는 1790년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하였으며 또한 많은 실학 서적들을 발간하여 모든 백성들이 다 잘 살 수 있는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기득권 세력의 벽을 부수지 못했고 그의 혁신적 이론은 결국 그의 말로를 불행으로 이끌어 갔다. 1800년, 실학의 후원자 정조가 죽자 권력을 잡은 노론벽파는 남인들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는 실학파를 모두 제거하면서 박제가도 그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신유사옥(윤행임 반역사건)에 연류되었다는 올가미를 쓰고 종성으로 귀양 갔다가 1804년에 풀려나서 이듬해 죽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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