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아버지의 아들
보스톤코리아  2015-02-10, 12:22:50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키 크지 않은 젊은이였다. 내 앞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여중고생 대여섯이 뒤를 쫓았다. 헐레벌떡하는 여학생 하나를 불러 세웠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신경질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박지성도 몰라욧!’. 유명한 축구선수 박지성도 모르는 화성에서 온 구舊인류에 노땅되었다. 시간이 남았길래, 공항 안을 어슬렁거리던 중이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꽤 오래전이다. 늦가을 전국축구선수권 대회였다. 11월초 동대문 축구장은 춥고 썰렁하다. 회색의 차가운 시멘트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오른쪽 사이드 라인을 타고 내려왔다. 공을 몰고 달려드는 모습에 내 눈이 집중되었다. 그가 입은 유니폼은 세로로 검은 줄무늬가 쳐진 흰색 저지였다. 맹수가 철창鐵窓 우리를 뚫고 달려드는 줄 착각이 일었다. 그의 허벅지는 두텁고 단단해 보였다. 내 허리만큼 두꺼운데, 알통처럼 근육은 출렁였다. 그의 코에서는 콧김이 힘차게 뿜어나오듯 싶었다. 달리는 말이 허연 김을 뿜어내는 듯 말이다.

수비선수가 뒤을 따르고 있었다. 한두 발 쳐져 있었다. 뒤에서 반칙성 태클을 걸지 않는다면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나운 짐승이 달려드는 모습은 차라리 전률이었고, 소름이 돋았다. 오한은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맹수는 차범근이다.

  차범근 아들도 국가대표 축구선수다. 차두리. 이름은 차붐답게 지었는데, 이젠 어색하지 않다. 별명이 차미네이터라던가 전차戰車라던가. 터미네이터를 연상케 한다나. 내가 일면 수긍했다. 차범근은 아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겐가. 시詩가 눅눅하다. 

세월이 나를 밀고와/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되고 보니
세월을 밀고 산 아버지의 길이/조금 보인다
(중략)
무덤의 죽은 풀/때마다 깎아 드리진 못해도
내 어린 것의 손을 잡고 선산을 찾아/아버지의 길을 가끔 바라본다
내 어린 것도/ 어느 날엔
제 아이의 손을 잡고/아비의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리다.
(장재선, 아버지의 길)
 
  아들 차두리의 백드롭킥을 기억하시는가. 골로는 연결되지 않았는데, 폼은 너무 멋졌다. 내 입에서 나온 아~아 하는 탄성을 내가 들었다. 2002년 월드컵이었다. 아버지보다 아들은 더 강인해 보였고, 든든해 보였다. 하지만 아들이 말했단다. “대한민국에서 차범근의 아들로 태어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그런 그가 호주 아시아선수권 축구대회에서 맹활약했다. 8강전에서 오른쪽 라인을 치고 달리는 모습은 아버지보다 더 맹수스러웠던 거다. 폭풍 드리블은 어시스트로 골로 연결되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아쉽다만 준우승이다. 그래도 장하다. 대~한 민국, 짝짝짝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마태 11:27)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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