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4
보스톤코리아  2015-06-08, 11:43:29 
자칭 ‘태권도 창시자’121) 인 최홍희는 1980년 김일성을 만나 전향한 후 북한의 지원하에 공산국가를 중심으로 전세계적으로 태권도 보급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1983년에 다시 북한을 방문하였고, 그의 계속되는 반정부 언행으로 태권도계의 인사들 뿐만 아니라 군생활에서 맺어진 극소수의 ‘충복’들만 남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편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세계 태권도를 통괄하는 단체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홍희는 1984년 자신의 국제태권도연맹(ITF)과 WTF의 통합을 제안하였고, 1985년에는 IOC위원 총회의 개막식에 참석하여 WTF와는 별도로 ITF를 세계 태권도를 이끄는 한 축의 공식기구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결과는 모두 허사로 돌아 갔지만 ITF의 국제적인 인지도는 높아졌고, ITF 스타일의 태권도 수련자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는 1986년에 시범단을 구성하여 중국을 방문하였다. 당시는 한중수교(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수교는 노태우 정부 당시인 1992년8월에 맺어졌다)가 없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의 태권도122)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처음 소개되는 계기였다. 그리고 1988년 태권도가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스포츠화됨에 최홍희는 심한 위기감을 느꼈다. 1970년대 초에 뒤늦게 창설한 WTF였지만 김운용의 탁월한 리더쉽으로 국제무대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혀가면서 성장한 이 기구는 19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국제스포츠면에서나 세계 무도계의 영향과 견인에서 ITF를 압도하고 있었다. 

특히 1988년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선정된 태권도의 호응도는 세계태권도계를 열광하게 하였으며, 그 주관 국제기구인 김운용이 총재로 있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의 입지는 한층 더 격상되었다. 반면에 국제무대에서 입지가 좁아져만 가는 최홍희는 1988년 4월 1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마란치 위원장 앞으로 장문의 호소문을 보냈다. 즉 세계태권도연맹이 주관하는 태권도는 가짜이며, 어떻게 그리고 왜 세계태권도연맹이 뒤늦게 태권도의 탈을 쓰고 나타났는가를 인식해야 된다는 내용과 ‘태권도’란 명칭도 자신이 작명한 것을 사용하며 경기내용과 규정을 모두 가라데와 비슷하기에 태권도를 대표하는 단체가 될 수 없다는 등의 내용과 함께 정통태권도 단체인 국제태권도연맹(ITF)을 국제 대표기구로 인정해 줄것과 ITF태권도의 규칙을 적용하여 경기를 할 수 있는데 협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국제 스포츠를 주관하는 IOC와 세계 태권도를 이끄는 인사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그 후 김대중정부 당시인 1998년, 부모묘소에 성묘하기 위하여 조국 방문을 희망하는 요청을 하였지만 허락되지 않았고, 그는 1972년 떠난 조국을 다시 밟아 보지 못했다.   

121) 최홍희가 태권도의 창시자는 아니다. 당시 수련하고 있던 무술인 당수도/공수도에 우리 고유의 무예인 ‘태껸’과 비슷한 발음을 찾아서 태권도跆拳道라고 작명하였다. 하지만 많은 무도계의 사람들이 그를 태권도의 창시자로 알고 있고, 국제태권도연맹(ITF)에서는 그 기구 창설 이후 그를 창시자로 줄곧 선전하기에 많은 일반인들은 그런 줄로 알고 있다. 1992년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원본에 태권도 창시자를 ‘최홍희’로 명기했다.   

122) ITF 태권도, 또는 북한식 태권도, 물론 그 후 중국도 WTF 스타일의 태권도를 받아들여 수련하고 있다.
WTF 스타일의 태권도는 1992년 12월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 최광윤 체육총회 부주석의 주선으로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북경대학교와 연변대학교에서 시범과 세미나를 하여 일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1993년 1월과 1994년 8월 국기원 시범단이 또 다시 심양, 하얼빈, 상하이, 북경, 천진 등 무술의 본고장을 순회 시범 하면서 태권도의 진수를 펼쳤고 그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그 시범의 열기가 가기도 전 1994년에 IOC가 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부터 정식종목으로 체택하면서, 동시에 중국 정부는 태권도가 금메달의 유력종목이라고 판단하고 각급학교를 비롯하여 널리 보급하면서 1995년 부터 정부가 공식적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
1994년 IOC가 태권도를 정식 올림픽 종목으로 체택하기 까지는 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일본(가라데)과 중국(우슈)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무술계의 반대와 방해공작 등은 대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국내외의 태권도인들이 하나가 되었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국민들의 열화같은 성원으로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의 리더쉽은 더욱 부각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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