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3. 유럽인들의 정착촌 건설 (3)
보스톤코리아  2015-07-13, 11:31:30 
스콴토 일화 (계속)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이주민들은 첫해 겨울에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반이 죽었다. 고기잡이에 큰 기대를 걸고 왔으나 필요한 도구도 제대로 챙겨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도 몰라서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1621년 3월 16일 이들에게 기적과 같은 행운이 일어났다. 이전에 영국 선원들로부터 영어를 배운 덕분에 비록 서툴기는 하나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디언 사모세트(Samoset, 1590-1653)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21일에는 영국의 런던에도 살았던 스콴토(Squanto, 1585-1622)라는 인디언을 데리고 다시 찾아왔다. 이들은 청교도들이 부근 왐파노아그(Wampanoags) 인디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인디언들이 물고기를 잡고 옥수수를 기르는 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백인들은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10월 첫 번째 추수 후 정착민들은 추수감사절 파티를 열고 원주민들을 초대했다. 이게 바로 오늘날 미국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낭만적 일화는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만들어진 동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디언들이 1621년부터 청교도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실은 맞으나 백인과 인디언들이 어울려서 가을 추수에 대한 감사의 축제를 열었다는 기록은 1637년에야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스콴토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스콴토는 1605년에 영국의 탐험대에게 납치되어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 등을 익힌 후 1614년에 탐험대의 가이드가 되어 미국으로 다시 오게 된다. 그런데 일부 영국의 탐험대원들에 의하여 스페인 말라가로 노예로 팔려갈 뻔 하다가 수도사들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다시 가게 된다. 그 후로 탐험대의 일원이 돼서 몇 차례나 미국을 더 다녀온 뒤 1919년에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38년 생애중 대서양을 여섯 번 건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최초의 이주민과 원주민간의 중간조정자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스콴토의 동족으로부터는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동족에 의한 독살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콴토 또는 스콴텀(Squantum)이라는 이름은 플리머스나 퀸시(Quincy) 지역에서 길 이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스콴토가 베풀었던 은혜가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스콴토가 했던 일들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1975년부터 매년 추수감사절 때마다 ‘반(反)추수감사절(Unthanksgiving Day)’ 행사를 열어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뉴욕이 화려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로 흥청이는 날이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디언 권리운동의 성지인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스 섬을 찾아 추수감사절을 애도하면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아니라 ‘추수강탈절(Thankstaking Day)’을 기념하고 있다. 이들은 “식량을 나눠주며 백인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면서 “기력을 차린 백인들은 원주민을 배반하고 땅을 빼앗았다”고 말하고 있다. 관점을 달리하면 누구의 축제일은 또 다른 누구에게는 애도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북동부 식민지 정착민과의 첫 전쟁
미국 북동부지역 인디언과 유럽인과의 첫 전쟁은 1634년에 발생한 퍼쿠어트(perquot)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퍼쿠어트 부족은 뉴욕과 코네티컷에 걸쳐 허드슨 강과 코네티컷 강 유역에 거주하면서 상당기간 동안 네덜란드인들과의 모피 교역에서 상당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한편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서 1620년에 최초로 식민지를 개척한 영국인들은 1628년에는 보스톤지역에 Massachusetts bay colony를 건설하고 이후에도 코네티컷 지역에 계속적으로 식민지를 추가하였다. 1630년대에만 수만 명의 영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영국인들이 그들의 식민지 활동을 퍼쿠어트 부족의 영역까지 확장함에 따라 그 지역에서 네덜란드인과의 모피교역 등 경제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퍼쿠어트 부족과의 갈등은 불가피하였다. 퍼쿠어트 부족과 영국 식민지간의 세력 갈등은 1634년 전쟁으로 확대되어 163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퍼쿠어트 부족의 참패로 끝을 맺었다. 이 전쟁에서 영국 식민지 인근에 거주하던 퍼쿠어트의 앙숙인 모히건부족과 나라간세트(Narragansett)부족은 영국 식민지 세력과 연맹을 맺고 퍼쿠어트 부족과 맞서 싸웠다. 패전의 결과로 퍼쿠어트 부족의 정치적 존재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생존자들은 서인도제도 등지로 노예로 팔려 나갔다. 전쟁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637년 5월 26일 발생한 미스틱 대학살사건(Mystyc massacre)이다. 이날 새벽 코네티컷강 어귀에 위치한 퍼쿠어트 부족 마을을 급습한 영국 측 연합군은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였다. 전체 약 400명의 인구 중 살아남은 사람은 채 다섯 명이 안되었다고 한다. 대학살을 주도했던 사람 중 하나인 언더힐(John Underhill) 민병대장은 신이 주신 말씀에 따라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면서 그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훗날 양심 있는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인종청소 성격의 genocide로 규정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신영의 세상 스케치 505회 2015.07.13
삶의 장단과 추임새...
한담객설閑談客說: 맨발의 청춘 2015.07.13
한 여름이다. 하지를 넘겼고 칠월이니 올해 후반기로 들어섰다. 폭설에 고생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일년이 벌써 꺾였다. 독립기념일 연휴는 잘 지내셨는지. ..
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3. 유럽인들의 정착촌 건설 (3) 2015.07.13
스콴토 일화 (계속)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이주민들은 첫해 겨울에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반이 죽었다. 고기잡이에 큰 기대를 걸고 왔으나 필요한 도구도 제대로 챙..
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8 2015.07.13
조선연무관(지도관의 전신)과 창시자 전상섭
“잘 놀아야, 큰 꿈도 생긴다.” - 좋은 습관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 X - 2015.07.13
양미아의 심리치료 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