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5. 조상의 땅을 사수하라 (2)
보스톤코리아  2015-08-19, 12:13:20 
폰티악 전쟁 (계속)
프랑스 지배 시절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 왔던 인디언들은 영국군의 침입으로 그들의 생존이 크게 위협받는다고 생각하여 영국군을 자신의 땅으로부터 몰아내기 위하여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유럽인들이 미대륙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는 나라에 따라 크게 달랐다. 사학자 파크만은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스페인은 인디언을 분쇄하였고(crush) 영국은 경멸하고 무시하였고(scorn and neglect) 프랑스는 인디언을 포옹하고 품었다 (embrace and cherish)고 한다. 

1763년부터 1766년까지 계속되었던 폰티악 전쟁에 참여한 부족 대부분은 ‘1763년도의 파리 조약’까지 프랑스가 소유권을 주장했던 ‘윗 나라(pays d' en haut)’에 살던 인디언들이었다. ‘윗 나라’에 속하지 않는 민족 중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이로쿼이 연맹이 영국군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폰티액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이로쿼이 연맹 소속 부족인 세네카족은 동맹에 불만을 품고 폰티악전쟁에 참가했다.

새로운 점령군으로 등장한 영국군의 태도와 정책들에 대하여 인디언들은 위기와 모욕을 느끼게 된 것이 근본적인 전쟁의 원인이었지만 1760년대 초 확산된 민족적 신앙운동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훗날 사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 운동은 영국에 대한 불만과 함께 식량 부족과 전염병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은 ‘델라웨어의 예언자(Delaware Prophet)’로 알려진 네오린(Neolin)이었다. 네오린은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의 상품이나 술 그리고 무기를 멀리하도록 권했다. 네오린은 전통적인 인디언 신앙에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시켜, 백인의 악습에 물들게 되면 영국이 인디언의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인디언들에게 설파하였다. 

영국군 최고 책임자였던 애머스트(Jeffrey Amherst) 장군은 인디언들에게 잔인하기로 유명하였다. 애머스트는 포로가 된 인디언들을 “즉각 사살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며 현대전에서나 있을법한 생물 무기까지 동원하였다. 그는 인디언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모든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면서 부하들에게 여러 장의 담요에 천연두 균을 오염시켜 인디언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민병대 지휘관이었던 트렌트(William Trent)는 그 담요를 전달한 목적이 인디언들에게 천연두를 감염시키기 위해서임을 밝혀주는 기록을 남겼다.

폰티악전쟁의 실질적인 전투는 1764년 사실상 종결되었지만, 일리노이에서는 인디언들이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쇼니(Shawnee) 족의 캐스케(Charlot Kaské) 추장이 가장 집요한 반 영국파 전사로 두각을 나타냈다. 캐스케는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뉴올리언스까지 여행하기도 했다.

1765년 영국은 일리노이 점령이 외교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영국 측은 폰티악에 초점을 맞췄다. 폰티악은 오하이오 영토에서 싸우던 인디언이 이미 영국과 정전협정을 맺은 것을 듣고, 전투 수위를 조절했다. 폰티악은 1766년 7월 25일에 온타리오 요새에서 영국 측과 정식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폰티악 전쟁은 영국계 정착민들의 식민지 확대에 대해 많은 인디언 부족이 공동 협력하여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캐스케는 영국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프랑스인과 인디언 도망자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건너 영국의 영토를 떠났다. 

폰티악 전쟁의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투에서 약 4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전사했고, 50명 정도는 체포된 후 고문으로 죽었다. 이 밖에 2,000명의 정착민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디언의 손실에 관하여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200여명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폰티악 전쟁은 흔히 인디언 측의 패배로 평가되어 왔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무승부로 보고 있다. 인디언은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에 실패했지만, 영국도 인디언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닌 협상과 중재로 전쟁이 끝난 것이다. 인디언은 영국 정부에 애머스트의 인디언 정책을 포기시켰기 때문에 일정 부분  승리를 쟁취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영국 정부는 이 전쟁을 통해서 이주민과 인디언을 분리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763년 10월 7일 영국령 북아메리카를 재구성하기 위해 국왕의 칙령으로 ‘1763년 선언(Proclamation of 1763 )’이 공포되었다. 이 선언은 폰티악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발효되어 있었지만, 폰티악 전쟁이 확대되자 서둘러 발표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 선언을 통하여 동부지역의 백인 식민지와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에 있는 인디언 땅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 이 결과 애팔래치아 산맥에서부터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거대한 인디언의 영토가 완성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주민이 인디언의 땅을 침범하는 것을 금지시키면, ‘폰티악 전쟁’과 같은 분쟁이 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인디언 입장에서는 ‘1763년 선언’을 ‘인디언의 권리장전’이라고 부를 만큼  크게 환영하였지만 영국 정착민과 토지 투기가들에게 이 선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어낸 전리품인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 서부의 땅을 부정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로 인한 불만은 식민지들의 영국에 대한 충성심을 약해지게 만들어, 훗날 미국 독립 전쟁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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