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백린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조사 (弔辭)
보스톤코리아  2015-10-12, 12:46:13 
어제, 백 선생님께서 저희 곁을 영원히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몇 분께 전화로 알려 드렸습니다. “참 좋은 분이셨는데” 라는 한결같은 표현들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참 좋은 분”을 만나고, 가까이 하며, 나름대로 삶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을 10여 년 전부터 누렸습니다. 

“이민100주년 기념사업회”에 참여하시며, 공동집필하신 “뉴잉들랜드 한인사”가 발간될 때 쯤이 됩니다. 그 후 “노인대학”, “성인대학”, “봉사회” 그리고 “역사연구회”를 통하여 이제까지 모시며 같이 하여 왔습니다.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세워지고 원활히 운영되기에는, 선생님께서 평소 쌓으신 한인사회 내에서의 인덕과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힘껏 베풀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학자셨습니다. 청년 시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재직하시며 당시 한국의 석학들을 접하셨던 영향과, 그 후 평생 같은 직에 계셨기에 자연스럽게 학자가 되셨습니다. 역사기록을 보존하며, 새로 기록하며, 연구하는 역사학자이셨습니다. 

사소한 기록물도 후세에 큰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다 모으셨습니다. 수집하신 희귀 도서 중 1,000여 점은 한국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도 하셨습니다. 

한편 역사에 관련된 많은 글을 쓰셨습니다. 지속하여 글을 쓰실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모님의 내조도 컸습니다. 교정보시고, 타자하시고, 팩스로 신문사로 보내시고. 최근엔 컴퓨터로 업그레이드도 하셨습니다. 쓰신 글 중 빼놓을 수 없는 역사기록이 있습니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6.25 동란 시, 조선왕조실록 등 국보급 도서 7,000 여권을 피난시키고, 3년간 충실히 지키신 자세한 경위에 대한 기록입니다. 선생님만이 쓰실 수 있었기에, 글로 남기시지 않으셨다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영영 잊힐 뻔하였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글을 쓰시는 다른 이유는 교민들에게 역사가 갖는 의미를 알리려는 큰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제가 좀 게을러지면 “윤박사, 글을 계속 자주 쓰세요” 라고 격려하시곤 하였습니다. 연세가 저보다 훨씬 많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료로 늘 대해 주셔서 어려웠기도 하였으나, 존경심을 더 갖게 하셨습니다. 

학구심이 높으셨던 선생님께서는 “역사연구회”를 조직하시고 남다른 애착을 갖고 계셨습니다. 소위 “글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모임이었습니다. “하버드에서 연금이 나와서 괜찮다”라고 하시면서 경비도 선뜻 다 부담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역사연구회” 첫 연구 발표회 주제는 한국의 오늘날 국제사정이 100년 전과 똑같다고 하시면서 “포츠머스조약”으로 정하셨습니다. 교민사회로써는 최초인 연구발표회였으나 매우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별도로 토론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회원들과 훈훈하며 신의를 지키는 관계를 항시 유지하셨습니다. 식사 때 단골 주문은 갈비탕이었습니다. 남는 뼈는 제가 기르던 개의 몫이라고 하시며, 따로 챙기시던 자상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지난 6월 병문안 시 저에게 약력이 적힌 봉투를 주셨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준비를 차분히 하시는 여유와 강인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가까이하며 모셨던 행운을 오래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먼저 가신 동료분들을 평소 그리워하시곤 하셨는데, 이제 부디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머리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비옵니다.

2015년 10월 2일 
윤희경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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