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3. 크레이지 호스의 부활 (2)
보스톤코리아  2016-04-11, 11:40:23 
크레이지호스의 생애 (계속)
1866년의 페터만 전투와 1876년에 있었던 로즈버드 전투와 리틀 빅혼 전투에서 인디언 연합군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수우족이 이 만큼의 땅과 전통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크레이지 호스, 시팅불 그리고 레드 클라우드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부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한 덕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을 수우의 전설을 만든 3인방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미국정부가 1980년 말부터 20년간 수행한 ‘위대한 미국인 기념우표 발행사업(Great Americans series postage stamp)’에서 레드 클라우드, 크레이지 호스, 세콰이야 그리고 시팅불 등 네 명의 인디언을 선정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그는 생전에 사진을 찍거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는 죽어서도 자기의 시신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의 부모는 그의 시신을 운디드니 근처에 비밀리에 매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무덤도 남기지 않고 라코타 부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묻혔다.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Crazy Horse Memorial)
생전의 모습도 사후의 무덤도 남기지 않았던 크레이지 호스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석상조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네 명의 대통령의 얼굴이 조각돼 있는 러쉬모어 산(Rushmore Mountain)으로부터 불과 20여km 떨어져 있는 산더헤드 산(Thunderhead Mountain) 한편에 말을 탄 용감한 모습의 크레이지 호스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  총 길이는 195미터이며 높이는 172미터에 달하며 크레이지호스의 얼굴 크기만 해도 러쉬모어 산에 있는 대통령 얼굴의 1.5배인 27미터나 된다고 한다.

이 조각이 시작된 사연 또한 매우 감동적인 스토리이다. 라코타 부족의 추장 헨리 스탠딩 베어(Henry Standing Bear)는 1927년에서부터 1941년에 걸쳐 만들어진 러쉬모어 산의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러쉬모어 산이 있는 블랙힐즈는 파하 사파로 불리는 자기네 부족이 신성시 해 왔던 성산이었기에 미국의 대통령들을 하필 여기에 조각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인들의 조각 작업을 막을 힘이 없으니 그 대신에 자신들도 자신들의 영웅을 조각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히 남겨줄 방도를 찾기 시작하였다. 1931년 가을에 헨리의 형 루터(Luther Standing Bear)는 먼저 러쉬모어 산 조각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보글럼(Gutzon Borglum)에게 편지를 보내 라코타 부족의 새로운 조각 작업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요청에 대하여 그는 아무런 답도 보내지 않았다. 

다시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동생인 헨리가 1939년 11월 7일에 대통령 얼굴 조각에 참여하였던 폴란드계 미국인인 Korczak Ziolkowski(코어초크 쥬얼카프스키라고 발음)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통령들의 얼굴 가까운 곳에 크레이지 호스를 조각하여 인디언들에게도 훌륭한 영웅이 있었음을 백인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호소했다. 스탠딩 베어는 한편으로 정부 관계기관에도 편지를 보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비옥한 토지와 쓸모없는 산더헤드 산과 교환하여 거기에 크레이지 호스 석상 조각을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여 긍정적인 답을 얻어냈다. 1940년 봄에 쥬얼카프스키가 파인릿지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하여 3 주간 머무르면서 부족 원로들로부터 크레이지 호스를 포함한 인디언의 역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선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다시 세월이 흘러 1947년 스탠딩베어는 커네티커트로 가서 쥬얼카프스키를 블랙힐즈로 모시고 왔다. 조각의 모형 제작 등 준비 작업을 거쳐 1948년 6월 3일 드디어 첫 발파가 시작되었다. 쥬얼카프스키는 그 때부터 1982년 사망 시까지 헌신적으로 조각 작업에 몰두했다.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인종차별적인 모욕도 받았으며 재정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정부의 재정지원 제의도 거절하고 민간단체의 기금과 개인적인 헌금 등 순수히 민간부문으로부터만 자금을 조달하여 공사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그의 사후에는 쥬얼카프스키의 열정에 반하여 18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루스(Ruth Ziolkowski)가 크레이지 호스 기념재단의 이사장이 되어 그녀가 낳은 총 열 명의 자녀 중 일곱 명과 함께 이 사업의 추진을 책임지고 있다. 당초 쥬얼카프스키는 말부터 먼저 완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사후에 미망인인 루스는 우선 크레이지호스의 얼굴부터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찾아오도록 만들면 기금조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작업진행 순서를 바꾸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아 들어가 1998년 얼굴이 완성된 후로 연간 백 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과 역사공부의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녀는 조각이 만들어지고 있는 인근 일대를 대규모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조성해 나갈 계획도 수립하였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북미인디언대학교(Indian University of North America)가 2009년에 건립되었으며 북미인디어박물관(Indian Museum of North America)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곳을 방문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암석발파를 하나의 축제성 이벤트로 활용하고 있다. 관광객들중 많은 사람들은 발파 후에 나오는 암석 조각들을 기념품으로 사가지고 돌아간다고 한다. 그녀의 헌신적인 공적이 인정되어 그녀는 1988년 사우스다코타 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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