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4. 제로니모와 나바호의 천리 길 (4)
보스톤코리아  2016-05-09, 11:37:20 
산 카를로스 주거지역으로 이주
코치스 추장이 죽은 후 장남인 타자가 추장직을 물려받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부족민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부족은 여러 분파로 분열하고 일부는 그동안 금지돼 왔던 백인에 대한 약탈을 다시 시작하기도 하였다. 인디언의 습격에 시달린 백인들은 치리카우아족의 주거지역을 옮겨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여 치리카우아족은 1876년에 산 카를로스(San Carlos)로 이주하게 되었다. 치리카우아 산의 거주지역에 비하면 산 카를로스는 모든 면에서 조건이 훨씬 나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절반가량의 인디언들은 새 주거지역으로 옮겨가지 않고 멕시코로 도망가 버렸다. 멕시코로 간 무리 중에는 전설적인 게릴라 전사인 제로니모도 끼여 있었다.

빅토리오 전투
멕시코로 넘어간 제로니모 무리들은 멕시코인들을 여러 차례 습격하여 가축들을 약탈한 후 뉴멕시코로 끌고 와 다른 농장에 팔아 총과 술 그리고 기타의 생활용품을 사오곤 했다. 그 무렵 빅토리오(Victorio) 추장은 밈브레 아파치족(Mimbres Apache)을 이끌고 뉴멕시코의 오호 칼리엔테 캠프(Camp Ojo Caliente)에 머물고 있었는데 제로니모 무리들이 친척관계에 있는 밈브레족을 찾아갔다. 1877년 3월 연방정부는 밈브레족도 산 카를로스로 이주시키고 제로니모를 비롯한 치리카우아족 탈주자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밈브레족과 함께 산 카를로스로 잡혀간 제로니모는 거기서 넉 달 동안 포로 생활을 하였다.

원래 화이트 산 근처에 위치한 산 카를로스 인디언 보호구역은 사막이나 다름없는 메마른 지역으로 식수를 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제반 사정이 매우 열악하였다. 여름이면 기온이 40도를 넘어가고 여러 가지 풍토병도 창궐했다. 농업용수를 확보할 수 없으니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어 아파치족이 스스로 먹을 것을 조달할 수 없는 형편이라 미군들로부터의 식량배급에 거의 전적으로 매달리는 처지가 돼 버렸다. 산에 가면 야생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으나 백인에 대한 습격을 우려하여 미군 당국은 사냥을 금지시켜버렸다.

산 카를로스에 수용된 인디언 숫자는 크게 늘어났지만 이에 맞춰 식량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아파치족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참다못한 빅토리오가 1877년 9월 2일 부족민과 함께 산 카를로스를 탈출하여 전에 살던 오호 칼리엔테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 미군에 붙들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다시 산 카를로스로 돌아가고 80명의 전사들만이 밈브레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탈출에 성공한 전사들은 1880년에 멕시코에 본거지를 설치하고 메스칼레로족(Mescalero)과 치리카우아족으로부터 전사를 불러 모아 세를 크게 늘렸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뉴멕시코와 텍사스에서 정착민을 살해하고 말과 생활용품들을 약탈했다. 습격은 회를 거듭할수록 더 거칠어졌고 백인에 대한 증오심은 더 높아갔다. 미군과 멕시코군은 빅토리오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1880년 10월 14일 멕시코군이 빅토리오를 포함한 전사들의 대부분을 죽였지만 30명 정도의 전사들은 그래도 살아남았다. 70세의 나나(Nana) 추장은 나머지 살아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미군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게릴라 전쟁을 수행하였다.

제로니모의 1차 산 카를로스 주거지역 탈출
1881년 9월 산 카를로스에 있던 치리카우아족 사이에는 적대적인 아파치 추장들을 체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제로니모를 포함한 약 70명이 주거지역을 빠져나와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산(Sierra Madre Mountains)으로 들어갔다. 1882년 4월 제로니모 무리들이 산 카를로스 주거지역에 남아있던 부족민들을 멕시코로 데려가기 위하여 화이트 산으로 왔다. 많은 부족민을 인솔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1868년도에 있었던 로만 노즈가 사망한 비처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퍼시스 대령이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해 왔다. 뛰어난 전술로 퍼시스 부대의 공격을 잘 막아냈으나 도중에 만난 멕시코 보병들에게 여자와 어린아이들 대부분이 살해당했다. 무리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어 이들은 나나의 게릴라부대와 합류했다.

아파치 인디언과 미군사이에 긴장이 더욱 높아지면서 더 많은 미군들이 화이트 산 주위에 배치되었고 이에 불안을 느낀 주거지역 인디언들이 탈출하여 멕시코로 들어가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멕시코로 이동하는 도중에 아파치들이 농장을 습격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여 백인들의 불안감도 높아갔다. 미군 당국은 크룩 장군을 애리조나 총사령관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크룩은 아파치 인디언과의 직접 면담을 통하여 산 카를로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실행했다. 군용 말이 먹는 건초를 백인 대신 아파치인디언으로부터 구입하고, 아파치 족이 농사지어 먹고 남은 농작물은 군에서 모두 현금으로 사 들이고 부족 경찰대를 만들어 부족의 자치제를 시행하였다. 

거주지역 안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멕시코에 은거중인 제로니모 무리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큰 숙제가 남아 있었다. 전에 같았으면 크룩은 당장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제로니모를 잡으러 출동하였겠지만, 그동안 크룩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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