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권사님의 도토리묵
보스톤코리아  2008-12-01, 20:35:55 
홍순영(한미 역사문제 연구위원 )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 뒷산에는 높게 자란 상수리 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낙엽이 떨어져 쌓일 때면 높은 준령이나 구릉 산비탈에 자란 상수리 나무 주변에는 남, 녀 구분 없이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산을 오르내릴 때가 이맘때였다.

식량이 귀한 때라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해 도토리를 줍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른들의 밥상이나 제사상의 제물로도 쓰고 긴긴밤 출출할 때 배를 채울 수 있는 야식으로 먹었던 음식이 도토리나 메밀로 만든 묵이었다.

같은 묵이지만 메밀 묵과는 달리 도토리로 묵을 만드는 일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높은 산을 오르내리면서 소쿠리에 도토리를 주어 담아 햇볕에 말려 껍질을 벗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껍질을 벗긴 도토리를 물에 담가 불린 후 맷돌에 가는 일이나 보자기에 싸서 짜낸 토로리 묵을 끓여 응고 시키는 과정까지 얼마나 많은 손질이 가야 하는 일인지는 묵을 만들어본 사람만이 힘든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메밀로 묵을 만들어 먹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메밀을 초가을에 걷어드려 햇볕에 말린 후 절구나 방아에 빻아 가루를 만들어 끓여 응고 시킨 것이 메밀 묵이다. 지금은 한국사회 어느 곳 할 것 없이 동내 주변 가게나 슈퍼에서 여러 가지 상표로 포장된 도토리 가루를 쉽게 구입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 산 도토리 가루로 만들어 낸 묵의 맛에서는 지난날에 먹던 도토리 묵의 맛을 느낄수가 없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도토리 가루에는 밀가루와 다른 첨가물을 섞은 것이 도토리 가루가 되어 그 맛 또한 예전에 먹던 도토리 묵과는 다르다는 것이 흔히 듣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어느 곳이던 한인이 운영하는 식품점엔 여러 가지 이름의 도토리 가루가 팔리고 있다. 이젠 가정이나 음식점에서고 도토리묵이 밑반찬으로 나오지만 그 맛이 예전에 먹던 묵 맛은 아니다.

식생활의 변화 속에 웰빙 음식이라고 이것저것 골라먹는 풍족한 음식 문화에서 누가 힘들게 도토리를 주어 묵을 만들어 먹겠는가? 또 한국 산하에서 도토리를 줍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에선 도토리 줍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살았던 보스톤 집 뒷마당간엔 몇 그루의 도토리 나무가 심어져 가을이 깊은 이쯤 되면 투닥투닥 떨어지는 도토리가 흩어져 쌓였지만 도토리를 주어 묵을 만들어 먹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출석하는 교회 어느 여 권사님이 도토리묵을 만들어 나를 비롯한 몇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던 일이 있었다. 그 여 권사님도 어린 시절 산에서 도토리를 주어 묵을 만들어 먹던 기억이 떠올라 자기집 근처 어느 골프장 주변에 심어진 도토리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비닐봉지에 주어 담아 말린 후 껍질을 벗기고 분쇄기에 갈아 끓여 만든 순수 미국산 도토리 묵 맛을 보라고 나눠준 성의에 고마움을 전했던 일이 있었다.

어려웠던 지난 시절 이산 저 산을 오르내리면서 도토리를 주어 묵을 만들어 먹던 일이나 춘궁기 힘든 보리 고개를 넘기면서 나물이나 쑥을 뜯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에 스치는 그림자처럼 떠오른다.

컴퓨터나 텔레비젼 핸드폰과 같은 과학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며 충족한 음식을 마음껏 먹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웬 도토리 묵이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슬픈 과거가 있기에 미래의 도전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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