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28
보스톤코리아  2009-10-19, 16:04:29 
왕국인 신라가 견제하는 이국 시대가 전개된다. 이 사실은 필자인 내 주장이 아니라 <발해고>의 찬자 이해고 선생의 주장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후신이었다고 하는 발해국은 멀리 동해를 건너 일본국과 30여 차례의 사신교환이 있었지만 남쪽의 신라와는 단 두번의 사신 왕래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남북 양국 관계가 과히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하여 서기 726년 당나라 현종의 흑수말갈 보호정책의 실현으로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 되면서 신라와의 사이도 평온치 못했다. 당나라에 있어서 위협적인 존재이던 돌궐왕 묵철(默綴) 이 서기 716년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돌궐은 당나라에 예속되고 만다. 이제 당 황제의 왕화(王化)의 기미정책에 순종치 않는 것이 동북부의 발해국왕 대조영이었다. 그런데 그 대조영이 재위 20년인 서기 719년에 서거하고, 태자 무예가 등극하였다. 발해국 제 2대 무왕이다. 무왕은 그 시호가 보여주듯이 발해국을 크게 일으킨 명군이다.

그런데 서기 723년 송화강 북쪽의 흑수말갈이 발해국의 강성을 두려워하여 당나라에 비밀히 사신을 보내 원조를 청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흑수말갈의 원조 요청은 오히려 발해국을 견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당현종은 흑수말갈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주의 흑룡강 지역을 흑수주라고 지정하고 당나라 관리 장사(長史)를 두어 흑수말갈을 지도, 감독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발해국 무예왕은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흑수말갈 문제를 토의 하였던 것이다. 무예왕은 말하기를 "흑수말갈이 전에는 우리와 상의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였고, 우리를 경유하여 당나라에 통했는데 지금 비밀히 당나라와 내통하여 우리를 앞뒤에서 공격하려고 한다. 이제 흑수말갈을 처부셔야 한다." 고 하면서 출병을 명령했다.

무예왕은 이복동생 문예와 외삼춘 임아상(任雅相)에게 수만의 군사를 주어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그런데 일찍이 당나라에 숙위로 갔던 문예는 당나라의 군사력을 잘 알고 있어서 형 무예 왕에게 진정하기를 "당나라의 군사력은 우리 발해의 수백배나 됩니다. 그 나라와 원수를 맺는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여 말갈정복의 중지를 거듭 간청했다.

그리고 국경지대에 가서 다시 상소하기를 "일찍이 고구려가 30만 대군을 가지고 당나라에 대적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발해국의 군사력은 고구려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라고 흑수말갈 정복을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이에 화가난 무예왕은 종형인 대일하(大一夏)를 흑수말갈 정복의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동생 문예를 즉시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서 밀려나면 죽임을 면키 어렵다. 왕자들간에 있어서의 세습 싸움에는 의례히 피를 보게 마련이다. 이씨조선 초기의 '왕자의 난'이 바로 그 한 예라고 하겠다.

더욱이 배다른 형제간에 있어서야 권력싸움에서 물려나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도피해야 한다. 지금도 나이 어린 동생에게 태자의 자리를 빼앗기고 타국땅을 방랑하는 왕자가 없지 않다. 문예는 분명 무예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그의 어머니가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 대조영 왕이 서거한 후에 제거해야 할 대상의 제 1호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나라의 현종황제는 궁지에 몰려 도망해온 문예 왕자를 기꺼이 맞아들여 그를 좌요위 장군이라는 높은 관직에 임명했다. 이 사실을 안 형 무예왕은 심사가 매우 좋지가 않았다. 무예왕은 당나라 현종에게 국서를 보내 국법을 어기고 도망한 문예를 처벌해주거나 아니면 본국으로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당나라의 현종은 말하기를 "문예가 궁지에 몰려서 우리에게 귀순하여 왔으므로 그를 살해할 수 없다"며 무예왕의 요청을 거부했다.

문예는 일찍이 숙위(宿衛)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머물 때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터이다. 그러므로 그를 형 무예왕에게 돌려보내 죽게 한다는 것은 인정상으로나 도의상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예왕과 문예는 배다른 형제간이라 그 사이가 처음부터 매우 좋지 않았던 것이다.

무예왕은 기어이 동생 문예를 암살하려고 비밀리에 자객을 보냈으나 결국 성사치 못했다. 이로 인한 발해국과 당나라의 알력은 10년이나 계속 되었다. 발해의 무예왕은 드디어 서기 732년 5월 대장 장문휴(張文休) 장군에게 압록강의 수군 수천 명을 이끌고 가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공격하라고 명했다.

장문휴 대장은 정예의 수군을 인솔하고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의 등주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자사위준(刺史韋俊)을 잡아 죽이고 일로 중국의 내륙으로 진격해갔다. 이에 놀란 당 현종은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으로 문예에게 유주의 군사를 주어 장문휴 대장의 발해군에 대적했다.

이 후 발해와 당나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당 현종은 장안에 와 있는 신라의 대복경 김사란(서기 732년 7월)을 급히 귀국시켜 신라에서 공사를 내어 발해국의 남쪽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당나라는 유주의 군사와 말갈병을 합쳐 바다를 건너 요동으로 진격해 갔다. 신라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발해국을 치자는 것이었다.

신라의 성덕왕은 당나라 현종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정예군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국의 남쪽을 공격했다. 그런데 그 때가 겨울이었다. 한 길이 넘게 눈이 내리고 또 산길이 험한 데다가 강풍을 만나 장병들이 반 이상이나 얼어 죽었다. 그래서 신라군과 당나라 군사는 발해군을 적수하여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헛되이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

백린(한미 역사 문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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