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17. 향원사(向原寺)의 옥충주자(玉蟲廚子)
보스톤코리아  2011-11-28, 14:53:15 
30대 비다쓰 천황이 사망한 다음에 그의 미망인 취옥희 항후(후일의 스이코 여왕)는 향원사에서 부군의 극락왕생을 부처님께 빌고 있었다. 옥충주자에 불상을 봉안하고 예불했었는데 이 옥충주자가 전 세계에 극상의 공예 유품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옥충주자의 주자(廚子)란 불상을 안치하는 궁전 모양의 당(堂)을 가리키는 것으로 노송나무에 검은 옻칠을 하고 횡목, 기둥, 문틀을 모두 금동으로 꾸미개를 붙인 목공(木工), 금공(金工), 칠공( 漆工) 회화를 가미한 종합 공예품이다. 주변을 장식한 꾸미개 밑에 비단벌레(玉蟲)의 날개를 깔았기 때문에 “옥충주자” 라는 이름을 얻었다. 자그마치 2,563마리의 비단벌레를 사용했다고 한다. 높이가 226.6cm 정면너비가 114.5cm로 주자의 1층 부분은 사면에 부처님의 전생을 담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부처님이 굶주린 호랑이를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호랑이 밥으로 시주하는 그림도 있다.

옥충의 날개를 공예 장식에 응용하는 기법은 한반도의 삼국만이 지니고 있던 기법이었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말 안장과 발걸이(등자) 밑에 비단 벌레의 날개를 깔아 놓은 유물이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옥충주자를 어디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한반도와 중국, 또 일본까지 거론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역사 소설가 시바료타로 씨는 회화의 기법이 한국적이기 때문에 한반도 도래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Jon Carter corvell 교수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부처님 그림을 예로 들었다. 원래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임진왜란 때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잡아간 것이 일본 호랑이의 효시가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호랑이 그림이 일절 없었다”면서 “당시 일본에 없었던 호랑이를 아스카때 그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옥중추자는 “호랑이의 고향 한반도 작품”이라고 하였다. Boston Museum of Fine art의 폐노로사(Fenollosa) 교수는 백제 27대 위덕왕이 옥충주자를 스이코 천황의 모후 견염원(소아도목의 딸)왕후에게 보냈던 선물이었다고 못을 박았다. 옥충주자는 스이코 천황이 사망한 다음에 법륭사로 옮겨져 지금은 볍륭사 보장원에 보존 되고 있다.

<오카데라(岡寺)와 의연 승정 (義淵僧正)>
오카데라는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 촌에 있는 역사가 있는 절이다. 사실 아스카 촌의 유적은 거의가 백제하고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틀릴 염려가 없다. 오카데라도 그중의 하나가 된다. 일본 사람들은 절(寺)을 “데라” 또는 “지” 로 부르는데 “지는 한자 寺를 발음한 것이고 데라는 일본사람들이 한국말 절을 델로 발음하려고 하였지만 ㄹ 받침을 발음할 수 없어서 ㄹ이 옆의 음절로 넘겨져서 ㅏ 모음과 합쳐져서 데라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 사원을 절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는 고구려의 아도( 阿道)가 불교 포교를 위해 신라에 와서 일선군(지금의구미)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는데 모례의 집이 털례의 집으로 불렸고 털이 덜→절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고 속설로는 절을 많이 하는곳이라서 절로 되었다고도 한다.

오카데라는 전설적인 승려 의연(~728 ) 스님이 있던 절이다. 아스카 시대의 고승들은 거의가 한반도 3국에서 건너온 스님들인데 의연 스님만은 행기 스님처럼 일본에서 태어난 고승이다. 생전에 그를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은 행기(行基) 대승정 스님, 도자(道慈) 스님, 또 후일에 동대사 주지가 된 양변 (良弁)스님 들이 있다.

의연 스님의 조상은 백제 성왕이다. 의연 스님의 선조 이치키 공이 성왕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아스카의 백제 도래인은 소가씨를 제외하면 오진 천황 때 도래한 아직기(阿直岐)의 후손 아직사(阿直史) 씨들이 아스카의 히노쿠마에 모여 살았고 의연 스님의 선조 이치키 공은 아스카의 반대편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의연 스님의 탄생 설화가 오카데라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스님의 부모가 자식이 없어 항상 관음보살에게 치성을 드렸는데 어느날 밤에 아기울음 소리를 듣고 나가 얻은 갓난 아이가 의연 스님이었다는 것이다. 제 38대 텐지(天智)천황( 661-671) 이 그 소문을 듣고 그 아기를 왕궁인 오카궁(岡宮)으로 데려다 왕자들과 함께 키웠다고 한다.

후일에 의연이 승려가 되자 텐지 천황은 그가 자라던 오카궁(岡宮)을 의연 스님에게 하사하였고, 그 왕궁이 오카데라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승정이 되었다. 첫번째 승정은 백제에서 도래한 관륵(觀勒) 스님으로 일본에 역법(曆法), 천문지리, 달력 등을 전해준 스님이다. 의연 승정을 키워준 텐지 천황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에 사이메이 천황을 도와 3만여명의 백제 부흥군을 파견했지만 거의 전멸당하고 거점인 주유성 마저 함락되자 “이제 조상의 무덤이 있는 조상의 나라에는 갈수가 없게 됐구나.” 라고 한탄한 사람이다. 나는 백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을 한 셈이다. 텐지 천황이 즉위한 다음에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직기(阿直岐)를 모신 오미아시신사(於美阿志神社)>
일본 서기 오진천황 15년에 백제왕이 아직기 편에 양마 두필을 보내었다. 천황은 말 2마리를 가루(輕)에 있는 마구간 에서 기르게 하였고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관장케 하였다. 가루(輕)는 지금의 나라현 가시하라 지역이다. 가시하라 지역은 백제계 도래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천황은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 박사를 초빙하여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는 것이 적혀 있다. 아직기와 왕인이 왜국에 오기 전까지는 글이 없었는데 이들이 한자를 가르치면서 한자의 뜻은 상관 없이 음(音)만을 이두식으로 표기 하는 글이 생겨 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인 에게 아직기와 왕인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오오사카의 하비키노에 왕인 박사 사당이 있는 것처럼 아스카 히노쿠마에는 아직기를 모신 오미아시 신사가 있다. 오미아시 신사는 긴테쓰 아스카 역에서 동남쪽에 도보로 15분이면 되는 거리에 있다. 히노쿠마는 아직기 후손들이 살던 곳으로 히노쿠마 라는 지명도 후손 중에 히노쿠마 형제들이 있어서 그냥 지명으로도 굳어지게 된 것이다.

신사 주위로는 긴메이 천황릉, 문무천황릉, 키비히메(吉備姬) 왕의 묘가 있고 예전에 오미아시 신사가 센카이 천황의 궁터였다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센카이 천황은 현재 일본 왕족의 선조라고 하는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인데 그의 왕궁이 백제계 도래인 아직기의 씨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중심부, 그것도 아직기를 모신 신사 안에 있다는 것은아직기 가문과 천황가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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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感謝)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