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12 : 제 2차 김홍집 내각의 성과
보스톤코리아  2011-12-20, 12:26:05 
일본군이 평양 전투에서 청국군에 대승하자, 일본은 자신이 생겼는지 조선의 정치 개혁을 본격적으로 다그쳤다. 왕실은 물론 내각에서도 일본의 태도를 좋아하진 않았다. 청일양국의 치열한 전쟁 중에도 김홍집 내각은 차분히 서정개혁을 추진하여, 짧은 시일 내에 많은 법안을 제정하고 구속의 폐단을 개선했다.

1. 양반과 상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다
2. 노예제도를 폐지한다.
3. 국가의 모든 행정기구는 법으로 정한다.
4. 양반의 과부도 재혼할 수 있다.
5. 조혼을 금한다.
6. 모든 공문서에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치 않는다.

국가의 행정조직의 근대화와 함께 사회의 옛 관습을 개선한 것이 수십 건에 달했다. 갑오경장의 개혁 사항을 일본 정부가 사전에 만들어 놓은 각본에 의한 것이라고 싸잡아 부정할 것은 아니다. 김홍집 내각에서 개혁한 제반 사항은 오히려 앞서 동학군이 제시한 요구 조건 보다도 더 앞서는 훌륭한 것이었다. 서정개혁을 직접 담당한 자는 오도리가 아니고 김홍집 내각이다. 그들은 일본을 위해서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 내정개혁을 강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섭정을 맡은 대원군이 경장 사업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전 서울대 교수 한영우 박사가 말하기를, “갑오경장 대한 최초의 반란은 대원군으로부터 시작된다.” 고 하였다. 대원군의 법무협판 김학우의 암살 사건과 평양에 주둔한 청군과 내통한 사실이다. 섭정 대원군은 이 기회에 자기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정부요인 중 민비 측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 계획을 세우고, 그 첫번 대상인 법무협판 김학우를 1894년 10월 3일 살해했다. 김학우는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이 연해주에 왕래하여 러시아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친로파로, 일본 공사 오도리 게이스케는 군국기무처의 회의 진행을 수시로 방해한다는 그를 좋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도리 공사가 친로파를 제거하기 위해 대원군과 짜고 한 암살 사건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없지 않았다.

김학우 암살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동학군이 다시 일어났다. 전라도에서 전봉준, 김계남 등 과격파가 이끈 십만의 농민군이 북상하여, 충청도 보은에서 일어난 손병희 군과 합세, 충청도의 공주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맞아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 수가 월등히 많았지만 일본군의 현대 무기를 당할 수 없어 전멸하다시피 패배하고 말았다.

이같은 불상사가 계속 일어나게 된 것은 그 책임이 일본 공사의 잘못 때문이라 보고 일본의 이토히로부미 정부는 1894년 10월 15일, 오도리 공사를 해임하고 그 대신 메이저 유신의 공로자이며 제1차 이도내각에서 대장 대신을 지낸 정계의 거물인 ‘이노우에 가오루’ 를 특명 전권 공사에 임명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노우에 공사는 10월 23일 서울에 왔다. 그는 서울 도착 즉시 국왕 전하를 알현하고, 저간의 사건과 개혁의 중요성을 설명드린 다음, 왕실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을 약속드리고 물러나왔다.

그런데 평양의 청국군의 영내에서 대원군이 청나라의 봉천 사단장에게 보낸 서신이 발견되었다. 쇄국보수주의인 대원군은 일본을 견제하고 청나라에 기대어 다시 권력을 잡아보려고, 평양의 청국군과 내통하고, 한편 호남의 동학군과도 연락을 취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했다. 어쨌든 이같은 사실이 폭로되자, 대원군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 정계에서 물어나 공덕동의 별장으로 하야했다. 그리고 군국기무처도 왕명에 의하여 1894년 12월 5일로 폐쇄되었다.

이노우에 일본 공사는 유능한 정치가로 그의 외교 수완도 탁월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조선의 정치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먼저 정권의 실세인 왕비의 이해가 앞서야 한다고 보았다. 이노우에 공사가 민비를 예방하여 충실히 말씀드린 노력으로, 정치개혁을 처음부터 반대하였던 왕비도 다소 이해를 하였고, 따라서 왕실과 내각의 관계도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민비의 이해를 얻지 못하고 조선의 정치 개혁을 실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민비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여걸이었다. 이노우에 일본 공사도 민비를 평하여 말하기를, “왕비께서는 어느 여성보다도 학식이 높고 총명하며 영특한 여성으로, 일찍이 그같은 여성을 보지 못했다”고 했으며, 적을 회유하고 손 아랫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인덕은 왕비를 당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 전집 참조) 민비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기로 하자.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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