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
보스톤코리아  2014-03-17, 11:04:24 
다음은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까지의 역사적인 배경과 무사들의 역할을 짚어본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배경을 보자면 당시의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여진과 후금의 실상을 봐야한다. 조선과 명나라가 8년 동안의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완전히 소진되고 있는 틈새를 타고 200여년 동안 조선에 ‘공물’을 바치며 살던 여러 여진족들을 건주위의 추장 누르하치가 통합하여 1610년에 후금을 건국하였다. 

정묘호란의 원인은 여러면에서 찾아 볼 수 있으나 먼저 후금의 누르하치는 그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비옥한 땅의 남만주를 침범하였다. 그러자 명나라는 조선으로 원군을 요청하였고 광해군은 강홍립을 장수로 하여 군사를 출병하였다. 하지만 명나라가 ‘사르후 전투’에서 패하자 광해군으로 부터 출병 전에 받은 밀지대로 강홍립은 후금에게 항복하여 후금으로 부터의 보복이 없었다. 그리고 조선은 명과 후금사이에서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면서 내부적으로는 국방을 강화하였고 군사력을 증강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1623년에 이서, 이귀, 김유,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의 서인 일파가 대북정권의 패륜성과 다른 붕당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독단적인 정권 운영에 불만을 품고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등극시킨 소위 ‘인조반정’40)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실리 외교와는 달리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와준 명분을 앞세워 뚜렷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후금을 자극하였고, 후금은 명과의 전쟁으로 끊어진 무역을 조선을 통해 조달하려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주전론을 주장했던 홍타이지(태종太宗)가 왕위에 오른 후 조선을 치고 싶었지만 요동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부대가 철산鐵山의 가도假島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조선 원정 동안에 배후가 불안하여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에 인조반정 직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던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가서 인조반정의 부당성과 조선의 미약한 군사력과 또한 모문룡의 군사도 오합烏合이라고 말하여 조선을 칠것을 종용하였다. 모문룡의 군사를 지원하는 것과 광해군 폐위를 보복한다는 구실로 1627년 1월14일 패륵貝勒(만주, 몽골의 부족장) 암니阿敏를 필두로 하여 3만여 명의 군사들이 침략하였다. 이 전란이 정묘호란이다.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며칠만에 황주黃州에 이르러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양국의 의도에 따라 곧 강화講和를 하였다. 형제지맹의 강화서약을 하고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도록 하였지만 후금은 강북철병의 약속을 어기고 일부 군사을 의주지역에 주둔시키고 무역을 통하여 많은 물자를 조달하였다. 강화서약을 어긴 후금은 1636년에 재침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40) 왕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왕만 교체하는 것을 반정이라고 한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두번의 반정 중에서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거사하여 중종을 왕으로 옹립하였지만, ‘인조반정’은 인조가 직접 주도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반정의 배경을 조금 살펴보면 광해군은 선조의 선위교지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다. 선조는 광해군의 모후인 공빈 김씨보다 인빈 김씨와 그 소생(4남5녀)들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인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 주려고 계획하였지만 신성군이 나이가 어려서 국사를 논할 입장이 못된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신하들은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청하였다. 곧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는 그간 신하들의 의견이 마땅치 않아 미루어 오던 세자책봉을 신하들의 뜻에 따라 광해군으로 하였다. 이렇게 전쟁중에 세자로 책봉되고 또 가까스로 오른 왕위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왕권을 위협하는 동복형인 임해군, 계비 인목왕후의 소생인 적자 영창대군, 그리고 인빈 김씨의 소생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 등을 제거하고 이들을 떠받치고 있던 소북파, 서인, 남인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리고 1618년에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그간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역모를 도모하던 세력들이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켰다. 바로 1623년3월12일에 일어난 사건, ‘인조반정’이다.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은 1615년 ‘신경희의 옥사’에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연유로 죽은 능창군의 동복형이다. 선조가 마음에 두었던 신성군은 죽고 없었지만 정원군(인빈 김씨의 3남)의 소생인 능창군이 군왕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라는 세간의 소리에 대북세력들은 그를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시켜 죽여 버렸다. 그러자 그의 동복형 능양군은 호시탐탐 광해군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모아 오면서 대북파와 모든 정쟁에서 철저하게 대치되어 온 서인세력과 손잡고 인목대비 서궁 유폐사건을 빌미로 거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가 왕위에 오르니 인조이다. 대북파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노선을 택했지만 서인들은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도와주었다는 명분으로 철저한 친명 사대주의 노선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서인들은 선조의 유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지지하며 인목대비를 따랐지만 대북파들은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서 질식사 시켰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흑과 백 2014.03.17
디지털카메라의 이해와 활용 컬럼 199
별에서 온 그대 2014.03.17
활짝 핀 꽃은 아름답다.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도 그지없이 곱다. 이건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가 한다. 그렇다고 꽃봉오리로만 남겨둘 수는 없다만 말이다. 꽃봉..
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 2014.03.17
인조반정과 무인武人들
통일로 가는길 2 2014.03.17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붕궤는 여러가지 매우 중요하고 위험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첫째: 대량학살 무기 확보 및 처리.둘째: 120만 군대의 무장해제 및 실업 대책..
<특별기고> 미주동포들의 조국 사랑,,, 자랑스럽습니다 2014.03.17
美 버지니아주 동해표기 병기법안 통과 보고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