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26
보스톤코리아  2009-09-21, 14:48:46 
전편(33호)에 이어서
오미시 (午未時) 에 서북풍 (西北風)이 분다는 것은 병법의 상식이라, 이 시각을 기해 명사수들이 화살촉에 불꽃을 끼어 일제히 쏘아대니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는 여기서 완전히 섬멸된다.

근근이 살아남은 글안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하여 돌궐쪽으로 가 귀순했다. 천문령에서 패전하여 많은 군사를 잃은 이해고는 패전의 책임이 두려워 영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단신으로 도망하여 돌궐로 가 귀순했다고 한다.(신당서 발해전 참조)

당나라의 신성황제 측천무후는 대조영을 진멸하기 위하여 또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병사들이 도중에 도망하고 또한 도로가 막히고 길이 험하여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다고 변명하였다. 천문령에서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의 미약한병사를가지고 강대한 당나라의 군사를 막아 크게 승리한 것은 대조영의 신통한 전술과 그의 탁월한 영도력에 힘입어 일사불란하게 대적한 전과이었다고 하겠다.

사실 천문령의 승리는 그 옛날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30만 대군을 맞아 청청강에서 파멸시킨 살수대첩에 버금가는 큰 사건이다. 대조영이 천문령 싸움에서 이해고의 당나라 군사에게 만일 패배하였다면, 발해라는 나라는 생겨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대조영의 천문령 승리는 그로 하여금 발해국을 건국해한 역사적인 승리였다고 하겠다. 천문령에서 이해고의 당나라 군사를 처 부순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다시 내륙으로 들어가 목단강 상류인 즉 오늘날의 돈화시 (敦化市)에 이르러 그 앞 동모산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우니 서기 698년 이다.

그 국호를 진국 (震國)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진국을 세우고 주민이 안전을 되찾게 되자 사방에 흩어졌던 난민과 이산 가족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가정을 정돈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진나라를 세운 대조영은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서북방면의 돌궐과 동맹관계를 맺고 요동을 아우르는 한편 동북쪽의 부여, 옥조, 예멘 등을 평정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한편 대조영을 공멸하려던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83세의 나이로 서기 705년 11월에 병사했다. 그녀의 사망으로 측천무후의 정권은 그 막이 내려지고 측천무후로 인하여 폐위되었던 중종이 다시 황제가 되어 당나라를 복구했다. 중종은 황제의 자리에 다시 오르자 서기 706년 시어사 장행급(張行_)을 사신으로 진나라에 보내 태조 대조영을 위로하면서 화친하기를 청해 왔다.

다음의 제 5대 황제 예종도 그 즉위 2년 (712년)에 낭장 최소 (郎將崔訴)를 진나라에 특사로 보내서 진나라의 태조 대조영을 발해국 왕에 봉하는 한편 홀한주 도독에 삼는다는 조서를 올리게 하였다. 그것은 만주의 요하를 중심으로 하는 요동지방 일대와 목단강을 중심으로 하는 흑룡강성 지역인 홀한주의 도독에 임명한다는 엄청난 제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당나라의 중종과 예종이 왜 그렇게 급하게 특사를 진나라의 대조영에게 보내 그를 위로 하면서 발해국 왕과 홀한주 도독에 삼은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반항과 침입을 두려워하여 택한 회유책이다.

동양사 특히 중국사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중국에서 내란이 일어나거나 황실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발생하면 호시탐탐 북방색외 민족들이 일거에 침입하여 중원을 장악하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6세기의 5호 16국 시대, 10세기의 5대 그리고 그 후의 요, 금, 원, 청, 등 정복왕조시대가 그 예라고 하겠다.

당나라는 제 3대 황제 고종 이후로 서북방면의 돌궐과 그 관계가 편온치 않았다. 사극 '대조영' 에서도 돌궐의 추장 묵척의 등장을 보지만 서기 697년 2월, 그러니까 발해국이 건국하기 2년전에 묵철이 돌궐의 가한 (可汗 : 왕임을 뜻함)임을 선언하면서 당나라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한다.

서기 702년 7월에 돌궐이 침입하였고 705년 12월에도 만리 장성을 넘어 침입하였으며 708년 11월에도 돌궐의 침입이 있었다. 서북쪽의 몽고 초원에서 일어난 흉노, 글안, 돌궐 등은 중국의 막대한 부와 패권을 넘보고 태원과 갈석산을 지나 산동성으로 침입해 오는 것이 그 경로이었다.

중국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한당 이래로 책봉과 조공, 그리고 결혼 정책을 앞세워 왔던 것이다. 당나라의 예종이 대조여을 발해국 왕과 홀한주의 도독으로 삼겠다고 조서를 보낸 것도 실은 일종의 회유책이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백린(한미 역사 문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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